고무진처럼 길게도 늘어졌던 여름, 여름 풀벌레 소리도 멈추게 한 폭염 속에서도 들판 노동을 쉬지 않았던 농부들의 시간이 마침내 한가위, 수확의 문턱에 이르렀다.

하지만 인류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상의 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 경제 구조상의 변혁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농사는 인류 경제활동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경작의 과정이 인간 삶의 본질적 부분과 맞닿아 있어 수많은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농부는 하늘과 땅에서 제일이라 이라는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철의 화로와 겨울철의 부채’라는 뜻이다. ‘때에 맞지 않아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동로하선(冬爐夏扇)’ 즉 ‘겨울철의 화로와 여름철의 부채’가 되면, 무엇보다도 요긴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는 셈이다.

부채는 여름철이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다가 가을이 되어 날이 선선해지면 버려지기 때문에 예로부터 ‘가을 부채[秋扇]’ 하면 사랑을 잃은 여인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 또한 더위와 추위에 따라 변하는 세상인심을 비판할 때도 비유적으로 많이 쓰였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런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세상의 이치이니, 쓰이고 버려지는 것에 대해 특별히 좋아하거나 노여워할 것 까지는 없겠지만 열심히 부채질하면서 이 여름의 무더위를 넘기다 보면 곧 선선한 가을이 돌아올 것이고, 물론 그때가 되면 부채는 다시 어느 구석으로 처박히게 되어 쓸모가 없어져 버려지질 것이다. 내년 여름 다시 돌아올 자신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쉬는 동안 열심히 종이에 기름칠하고 부챗살에 힘을 길러 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 국가라는 것도 결국 사람들의 모임이다. 사람들의 모임은 눈에 보이는 규칙이나 보이지 않는 규칙에 의해서 유지되며, 그 사회의 규칙은 어떤 궁극적인 가치 기반 위에 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키기를 바라고 지키리라 믿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 사이의 상호성이다. 내가 이것을 지키면 저 사람도 이것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 믿음을 배신하면 이쪽도 더는 그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치라는 것도 그냥 무너지게 될 것이다. 달고 쓰고를 떠나 서로를 아껴 달라는 본능의 사고를 요구 하는 것이다.

높아진 하늘과 황금들판의 무르익은 곡식과 백과의 탐스러운 과수나무들에서 가을이 한 발짝 문턱에 한 발 올려놓음을 느낀다.

이번 여름 무더위는 참으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제 곧 무더위도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매미 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더위가 물러가는 것은 반갑지만 한철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을 때 또 남은 해를 헤아리며 아쉬움에 잠길지 모르겠다.

이번 추석에는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지난 시간 더위와 사투를 벌인 부채의 기억을 온전히 남기는 은혜를 베풀어 보자.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려는 자연스러운 마음 만들기를 해보자. 부채와 화로에게서는 나쁜 기억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 없다고 해서 버리지 말고 내년이면 다시 찾을 그것들을 위해 마음 한구석을 듬뿍 쓰자. 기억은 족쇄가 아닌 든든한 발판이 된다. 좋은 가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여름을 잘 떠나보내야 한다. 똑 같은 시절과 시간은 아니겠지만 찬찬히 살펴 기억에 새기는 것, 올 여름을 배웅하는 최고의 작별인사가 아닐까.

하지가 지나면 동지를 향해 조금씩 가고, 동지가 지나는 순간 하지를 향해 나아간다. 초승달은 반달을 거쳐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은 다시 초승달이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계속 순환 반복한다. 이 순환의 법칙은 우주에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인간은 무엇이든 끝까지 누리면, 쇠할 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많이 가졌던 만큼, 끝까지 향유했던 만큼, 절정으로 즐거워했던 만큼, 상실의 폭 또한 깊고 넓다. 이는 우주의 엄혹한 법칙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결코 영원불변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한 점 바람 없는 여름 날 부채는 우리에게 선선한 바람을 주었고, 살을 애이는 강추위에 화로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었다. 때마다 행복했고, 때맞추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시절은 옛 모습 그대로 또 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또 우리 곁에서 조건 없는 우리들과의 신뢰를 바라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들을 아껴야만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