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인감증 사용을 두고 부부간 싸움이 잦았다. 인감증 사용이 과다하게 이뤄져 월급날에 빈 봉투를 받아들기 때문이다. 인감증만 있으면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으니, 술 좋아하는 사람은 인감증을 뒷주머니에 차고 사흘 도리로 술집을 드나들었다.

  당시 푸줏간 즉 식육점에서는 술을 함께 팔고 있었는데, 광부들은 돼지고기를 안주로 하여 술을 한 잔씩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에 돼지고기를 술안주로 시켜놓았으니 최고급 안주를 먹은 셈이다. 술값 계산은 인감증이 대신했다. 그렇게 식육점에서 먹고 나면 봉급 명세서에는 술값이 아니라 돼지고기 값인 ‘돈육대’란 명목으로 공제됐다.

  어룡광업소에서 있었던 돈육보험 사건은 탄광촌의 유명한 일화이다. 1970년대 어룡광업소의 한 광부는 월급봉투에서 당시 상당히 큰돈인 2만8천원을 돈육대로 공제했다. 그런데 아내의 잔소리가 없자 계속 식육점에 들러 고기 안주로 술을 마셨다. 매달 돈육대가 공제되는 것을 궁금히 여긴 아내가 하루는 남편에게 ‘돈육대가 뭔데 매달 지출되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차마 술값이라고 대답은 못하고 머리를 짜낸 궁여지책의 대답이 ‘돈육보험’이었다. 당시만 해도 보험이라는 제도에 낯설던 시절이니 아내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또 몇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돈육보험’ 들었다는 얘기를 이웃 사람들과 나눠봤지만, 모두가 그런 보험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게다가 이웃 아주머니들이 나서서 이상한 보험 같다면서 남편의 계약서를 보라면서 충고까지 했다.

  어느 날 저녁, 아내는 남편더러 보험계약서라도 보자고 다그쳤다. 벌써 몇 달째 돈육대를 공제하면서 뻔뻔해진 남편은 퇴직할 때 광업소가 주는 보험료이므로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만 칠뿐 이었다. 몇 날을 더 고민하던 아내는 회사로 찾아가 남편 소속 갱의 갱장과 면담을 했다. 퇴직할 때 진짜 회사에서 주는 돈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갱장에게 돈육보험이 어떤 종류의 보험인지 물었다. 갱장은 돈육보험 얘기는 처음 듣는다면서 어리둥절했다. 광부의 아내는 월급봉투에도 쓰여 있다면서 명세서를 내밀었다. 회사가 퇴직할 때 주는 보험이라는 남편의 말까지 전했다.

  그제야 갱장은 돈육보험이라는 것이 돈육대 공제라는 것을 알았다. ‘아하, 이거 술값을 두고 돈육보험이라고 둘러댔구나’하고 눈치를 챘지만 당장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많은 남편들이 잘못해놓고도 회사 핑계, 동료 핑계를 대던 것이 예사이던 시절이 아닌가. 갱장은 부하직원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어떻게 답변해야 이들의 부부싸움을 면하게 할지 궁리를 짜내고 있었다.

퇴직할 때 정말 타는 돈이 맞는지, 이자는 얼마나 되는지 진지하게 묻기까지 했다. 그때 마침 곁에 있던 눈치 빠른 부하직원 하나가 설명해주겠다고 밖으로 데려나가면서 갱장은 곤란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광부의 아내는 명확한 답변을 못하는 갱장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눈치는 챘다. 게다가 돈육대란 광부들이 건강을 위해 먹는 고기라는 직원의 입에 발린 설명을 들으면서 술값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날 밤, 어룡사택이 떠나가도록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아내의 일방적인 공격과 남편의 궁색한 방어전이 밤새도록 계속되는 동안 소문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룡광업소의 돈육보험 사건은 수도방송을 타고 태백 탄광촌 전역에 퍼졌다.

  돈육대를 돈육보험으로 거짓말하던 것이 들통난 다음 달부터는 모든 광부의 봉급봉투에서 돈육보험, 그러니까 돈육대 공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광업소가 나서서 돈육대는 인감으로 공제하지 못하도록 제도화시켰기 때문이다. 돈육보험 사건 때문에 돼지고기 안주를 좋아하던 광부들이나 술집들도 함께 철퇴를 맞아야 했다.

  그 뒤로 많은 동료들이 사건을 만든 광부를 만나면 “나도 돈육보험 하나 들자!”면서 놀려댔다. 돈육보험의 주인공은 퇴직 후 태백을 떠났지만, 태백에서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돈육보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술자리에서 돈육보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지금도 웃음이 터지곤 한다.

  돈육보험 사건은 광업소와 광부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요즘은 사생활을 이유로 가정과 직장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가정과 광업소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회사에서는 가정에 통지문을 보내 가정의 역할에 대해 계몽활동도 했고, 광부의 아내나 어머니를 초청해 교육하기도 했다.

  또 가정의 어려움을 광업소 상사와 의논하도록 당부했고, 실제로 많은 상담이 이뤄지곤 했다. 집안의 개인적 문제를 광업소 관리자와 의논할 정도로 가정과 회사의 유대는 돈독했다. 상담 신청 절차 같은 것도 없었으니 아무 때나 찾아가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관리자를 찾아가서 울기도 하고,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남편 흉을 보기도 하고, 혼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취직이 어렵던 시절, 해고가 가장 두려웠으니 광업소 관리자의 말이라면 부모 말보다도 더 잘 들었다. 그래서 광업소 관리자를 찾아 상담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컸다. 상담에 나섰던 아내나 어머니가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면 비밀까지 잘 지켜졌다. 심지어는 관리자가 술 한 병을 사 들고 문제를 지닌 광부의 가정방문에 나서서 직접 고충을 듣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광업소의 관리자는 가정상담을 통해 부하 직원의 품행뿐만 아니라 부하 가정의 미래까지 함께 논의하는 등 참으로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절에는 사람 사는 맛이 났다. 그것이 탄광촌의 인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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